모범택시 2의 김도기 기사님의 활약상에 통쾌함과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선사한 배우 이제훈을 연기와 맛깔스러운 대사로 전편을 쿠팡플레이에서 보고 나서 역사 실화이야기를 다룬 영화 <박열>을 보았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내각은 사건은폐를 위해 '불령사'를 조직하여 활동한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는 대표적 인물로 지목한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에서 일제 만행을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 대법정에서 조선인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공판의 실화를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실제 일어난 고증을 철저하게 채집하여 영화로 개봉했다.
관동대학살 실체를 국제사회에 알린 역사 실화 <박열> 등장인물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로 대지진으로 혼란을 겪고 쓰나미가 덮치는 등 일본은 수많은 지진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나라이다. 우리가 요즘 들어 겪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오염수를 방류하는 부분에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에 대규모 지진과 해일이 발생하여 후쿠시마 현에 초대형 쓰나미가 발생하여 원자력발전소가 방사능 누출 사고를 당했다. 후쿠시마원전사고를 처치하는 과정에 모아 두었던 방사능 오염수를 무단 방류하려는 일본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무시하고 오염수가 무해하다며 바다로 방류하려 한다. 이와 같이 일본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그 피해가 엄청한 후폭풍을 가져오는데 실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일본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이 일어나고 일본 육군과 경찰은 이 지진을 이용 날조한 유언비어를 퍼트려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일본 내각은 당시 민란의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고 이를 역이용하여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다. 유포된 괴소문으로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하자 국제사회의 비난이 우려된 일본 내각은 조선인의 대역죄인을 만들기로 한다. 일본 제국주의 대법정에 맨몸으로 맞선 조선인 박열의 실제 사건이며 일본제국을 뒤흔든 역사 실화이다. 영화는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의 출연자는 이제훈(박열 역), 최희서(후미코 역), 김인우(미즈노 역), 야마노 우치 타스쿠(후세 역) 요코우치 히로키(후지시타 역), 김수진(마키노 역), 김준한(다테마스 역), 권율(이석 역), 민진웅(홍진유 역), 백수장(최영환 역), 한건태(가즈오 역), 정준원(김중한 역), 윤슬(하쓰요 역), 배제기(최규종 역), 최정헌(정태성 역), 박성태(아카이케 역)로 많은 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영화 속 불령사에 조직원인 홍진유는 박열과 가네코를 연인으로 이어준 인물로 박열이 투옥되자 변호인을 선임하기 위해 애쓰고 재판에 참석한 외신기자와 일본인들에게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실을 알린다. 김중한은 불령사의 전 조직원으로 박열과 동지이며 의열단과 연계하고 불령사 활동문제로 박열과 갈등하는 인물로 일본 공작에 걸려 고문을 당하다가 박열에 대해 불었던 것이 일본 법정에 박열을 세우게 된 것이다. 구리하라 가즈오는 불령사에서 운영하는 어묵가게에서 조리를 하면서 문명국 시민답게 행동하자며 박열의 재판을 외신기자에게 전하고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 원고를 넘겨받아 출판해 주는 역할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뒤흔든 실화 <박열> 정보와 줄거리
영화는 1923년 일본을 배경으로 온몸이 땀에 절어 인력거를 끌고 뛰어가는 조선인 박열이 등장한다. 손님을 태우로 열심히 달리는 동안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며 일본여성의 후미코가 책을 보고 읽고 있다. 박열에게 관심이 많은 후미코는 박열에게 한국말로 '우리 동거합시다'라고 말하고 두 사람은 동지로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동거서약을 만들어 지장을 찍게 한 동거 서약의 내용은 동지로서 동거하고, 운동활동에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이 타락하여 권력과 손잡는 경우 동거생활을 그만둔다고 적혀있다. 박열은 불령사 조직원 김중한과 사제 폭탄을 만들어 시험해 보지만 실패한다. 폭탄을 거래하기로 한 상해에서 연락이 없어 실제 폭탄을 만들려 한 것이다. 박열과 조직원들은 독립자금을 몰래 횡령한 변절자를 찾아내어 조직원들이 집단으로 두들겨 패버린다. 불령사 조직원들은 정기회동을 하고 박열은 회동을 마치고 중한에게 상해에서 폭탄을 가져오기로 한 것을 중지시키자 자신을 의심한다고 중한이 오해한다. 후미코는 동지로 지내는 자신에게 폭탄이야기를 하지 않은 박열과 다투고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관동대지진이 일본열도를 뒤흔든다. 일본 내각은 비상소집으로 관동대지진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백억 엔 이상의 피해액과 화재로 수습을 하려 한다. 미즈노 렌타로는 수습보다 대책이 최선이라 한다. 일본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거세지기 시작하고 폭동이 일어날 지경에 이른다. 미즈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자 내각일원이 계엄령을 반대한다. 미즈노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돈다며 국가주요 시설과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지려 한다고 말한다. 일본 민심의 폭동을 막으려면 조선인들을 학살할 명분을 유포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합의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청년단원을 조직하여 조선인과 사화주의자를 경계 감시하고 대책을 강구하라 한다. 일본 내각의 계략으로 인해여 6천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하게 관동대학살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관동대학살 사건을 은혜하려고 불령사 조직원들을 잡아 고문하다가 박열에 대해 듣게 되면서 그를 모든 사건의 배후로 만들게 한다. 영화는 불령사 조직과 사회주의 일본인들을 전면으로 내세워 조선인학살을 은폐하고 일본을 전복하기 위한 반역을 토벌한다. 일본 대법정에서 박열을 일본의 반역자로 공표하여 외신기자들에게 조선인학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재판을 벌인다. 박열은 자신이 히로히토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하며 사건을 더 크게 만들고 박열과 후미코를 제외한 불령선인들은 풀려난다. 중한은 일본인 후세를 만나 도움을 청하자 언론의 내용을 알고 있는 후세는 박열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니 도와주겠다 한다. 박열을 면회한 후세는 기소중지 신청을 하겠다 하자 박열은 그대로 나 두고 조선인 최초 대역죄인이 되겠다 한다. 오히려 일본인 다테마스는 대역죄로 기소하지 않겠다고 하고 박열은 무조건 대역죄로 기소하라고 큰소리친다. 미즈노에게 불려 간 다테마스는 박열이 허황된 이상주의자라 고하자 미즈노가 심문을 계속하라고 한다. 다테마스는 재판을 이용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니 후회하실지 모른다고 미즈노에게 박열이 두렵다 말한다. 일본 대법정에 공판이 열리고 후미코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입장하고 그 뒤를 박열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등장하여 혼례식장처럼 분위기를 바꾸어 버린다. 재판장이 등장하여 이름을 묻자 "나는 박열이요" 대답하고 재판장이 "그건 조선말이 아닌가" 하자 박열이 "그렇다" 대답한다. 재판장 분위기는 싸해지고 요미코에게 이름을 묻자 " 나는 박분자다"라 말하니 뒤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조선말을 하냐 바로 사형시키라며 아수라장이 된다. 재판부는 결국 일반 방청을 금지시키고 모두 법정 밖으로 쫓아낸다. 박열은 2차 법정에서 일본의 만행을 밝히고 역사 앞에 사실을 국제사회에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증언들을 확인하여 유골을 발굴하라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잊지 않겠다고 한다. 등장인물 모두가 실존했던 역사 속의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자 스스로 사형 선고를 받은 영화 <박열>의 줄거리이다.
일본의 역사적 재판에 맞짱 뜬 조선인 <박열> 후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관동대지진에 대하여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 1923년 9월 1일 오전에 사가미 만을 진원지로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한다. 건물이 붕괴되고 지진 이후 화재로 인한 인명 피해가 83%로 가장 많이 발생한다. 진도 7.9로 그 당시 일본 내무성의 피해조사의 따르면 사망자 91,344으로 집계되고 그중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75,953명이었다. 9월 3일까지 3일간 화재가 이어지고 도쿄 시가지 44%가 전소되었다. 대부분이 목조 가옥으로 인구밀도가 높고 도시계획이 없던 때라 피할 곳이 없어 큰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겪은 여러 기록들이 넘쳐 났고 지진에 다른 여러 가지 풍문이 돌게 되었다. 대지진이 또 일어난다거나 대형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유언비어가 만연했다. 9월 1일 이후 불량선인이 습격하고 사회주의가가 방화를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와 우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으면 독에 중독되어 죽는다는 근거 없는 말들이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일본군부는 계엄령을 내려 치안강화를 하고 군대와 경찰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를 검거한다. 유언비어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도쿄의 주민들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친척이나 지인의 안부를 알려고 방문하는 조선인들을 선별하여 죽창과 쇠갈고리로 학살했다. 역사적 사실을 조사한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와 김승학은 조선인이 6천 명이 넘게 학살된 것이 기록되었다. 요시노 사쿠조는 1878년생으로 1933년까지 살았던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인으로 사회민주주의 사상가였다. 일본의 내각은 식민정책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문제가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 것이 두려워 은폐하기 위해 조선인 중에 뒤집어쓸 사람으로 '박열'을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간파한 박열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제죽주의 일본의 심장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지로 대법정에 서서 일본열도를 발칵 뒤엎어 버린다. 박열은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 줘야지"하며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여 자신이 사형을 무릅쓰고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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